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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 기형도, 노을
부족한 사회력 | 낮은 자존감
...쳐다보지 말아줘, 아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읆조리며 눈을 피했다.
처음 아이를 바라보았을때 드는 인상은 구름 뒤로 숨은 달,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들과 지내본 적이 거의 없는 탓에 말수도 적고 밋밋하며, 자신의 감정표현을 하는데 서툴렀다.
...나, 무언가 잘못 말한 게 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요.. 목소리는 언제나 기어들어가듯 작았고 확신이 없었다.
자신을 민폐라고 여겨 모든 행동에 자신감이 없었으며 어쩜 저리 자존심이 없을까 할 정도로 사과를 자주 했다.
퇴폐적 | 경계하는
한없이 작고 호수 표면에 비치는 달처럼 너울너울 흔들렸지만, 아이에게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빛이 없고 선명한 눈동자는 여러번 상처입어본 사냥감의 눈빛과 비슷했다. 아이는 누구에게도 쉽사리 다가가지 않았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그리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고 잔뜩 몸을 굳혔다.
불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맨 첫번째 방법.
누구에게도 쉽게 믿음을 주지 말 것,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말 것.
상처를 가득 끌어안은 그러한 강박감은 아이를 점점 더 작게 말아 고슴도치처럼 만들었다.
미안해, 너를 믿을 수 없어.
차분한 | 성숙한 | 조용한
...달님이 포기해야 할 것이라면, 기꺼이 할거야. 자신의 희생을 입에 담는 아이의 목소리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담담했다.
아이의 내면에 깊숙히 새겨져있는 성숙함과 희생 정신, 책임감은 '햇님'과 '달님'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늘 아이같은 햇님과는 다르게 19살, 준성인에 걸맞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올곧은 도덕관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늘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부정적 | 현실적
늘 동화속에 사는 듯한 '햇님'과는 다르게, 아이의 세계는 차갑고, 묵직하고, 음울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아이는 늘 현실적으로 발생 가능한 가설만을 세웠고, 헛된 희망이나 기대감 따위는 배적하다시피 했다.
이는 어찌 말하면 현실적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비관주의였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체의 여유도 주지 않으려 했다.
사랑? 우정? 달님에게는 다른 세계 이야기야. 아이는 속으로 그리 말하며 자신을 비웃었다.
고독
다가오는 건 무서워,... 하지만 멀어지지도 말아줘, 부탁이야.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는 늘 외로웠다. 자신이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끽하고, 다른 사람들의 애정 속에서 살고 싶다ㅡ는 당연한 욕망을 가진 것을,
아이는 죄처럼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이 그립고 외로움 타는 것을 감추고자 했다.
달님은 별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모든 걸 비춘다. 쓸쓸하게,
그리고 아무도 없이.
나는 애초부터 구원받기 틀린 장르였지
/유리아, 에키드나
달님
아, 차라리, 온전히 미치기라도 했으면…
읽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웃어, 넘기라도 할 텐데
/최영미, 불면의 일기
01- 달님, 심연을 닮은 아이. 아이는 자신의 이름인 츠키히(月日)의 '月'자를 따서 자신을 '달님'이라고 부른다.
빛과 온기가 없는 세계에 갖혀버린 아이가 자조하듯 지은 쓸쓸한 이명.
02-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자와 츠키히의 두번째 인격.
햇님의 이야기(1)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옛날옛날에, 작고 여린 '햇님'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새로운 집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어서 오렴, 무척 힘들었겠구나."
"이곳은 모두가 한 가족인 따스한 곳이란다."
새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는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가고, 케이크를 굽고, 산꼭대기로 밤하늘을 보러 가기도 하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아이가 일곱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
햇님이 산속으로 꼭꼭 숨어 들어간 아주 깊은 한밤중에 새아버지가 한 손에는 커다란 분홍빛 곰인형을,
한 손에는 무언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영롱한 초록색 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아이의 방으로 걸어들어왔습니다.
와아, 아빠! 그거 햇님 선물이에요? 너무 예뻐요!
아이는 환히 웃으며 아버지의 품에 뛰어들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아이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평소에 '상냥한 아버지'가 아니라는걸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요, 그것은 피터 팬에 나오는 후크 선장, 빨간 모자에 나오는 사악한 늑대에 훨씬 더 가까운 ...
뒷 페이지가 찢겨져있다.
달님의 이야기(1)
나는 방금 내동댕이쳐진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무릎이 쓰렸습니다.
내 자리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서 쨍그랑,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사악한 늑대가 들고 온 술병이었겠지요.
새아버지는 술을 먹었거나 혹은 낮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을 때,
이렇게 한밤중에 저의 방에 찾아오거나 어딘가로 데리고 가 저를 때리고, 또 때렸습니다.
아동 복지 재단의 대표가 자기가 입양한 아이를 때리다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하필 대상이 저인 이유는 귀엽고, 가장 어리고, 말 잘듣는 착한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또, 저의 친아버지에게 과거에 악감정이 있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겠지요.
(이건 그 늑대의 입으로 직접 들은 말이에요.)
저는 달님, 밤의 아이입니다.
제가 눈을 뜰 때면 언제나 캄캄한 밤. 햇빛을 본 적이 거의 없지요. 저는 0에 가까운 인간이었습니다.
맨 처음 기억으로 남은 것은 제가 일곱살이 되었을 때의 7월 3일이었습니다.
제 기억은 도넛홀처럼 뻥 뚫려 있어서 아침을 맞이한 기억도, 낮의 기억도, 해질녁의 기억도 전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오롯이 밤의 기억 뿐. 그것도 언제나 사악한 늑대에게 폭행당하는, 괴로운 기억들 뿐이었습니다.
오늘은 몇월 며칠일까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달력을 곁눈질했습니다.
저는 현재 13살, 시계를 볼 줄도 달력을 볼 줄도 알지요. (기억과는 별개로 지식은 그대로 머릿속에 쌓이는 모양이에요.)
오늘은 6월 24일이었습니다. 6월 24일 새벽 2시...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저는 종아리를 억세게 붙잡혀 반쯤 세워진 채 뒤로 질질 끌려갔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츠키히. 생일파티는 저녁이지만 생일은 미리 줘도 괜찮겠지?"
생일? 츠키히의?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생일은 7월 3일이었습니다. 오늘 생일을 맞이한 아이는 누구였을까요?
아아, 그렇구나. 나는 밝은 태양 아래 있는 '낮의 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생각을 더 이어가려는 찰나, 굳은 주먹이 곧장 제 얼굴로 향해 까무룩 의식이 끊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뒷 페이지가 찢어져있다.
햇님의 이야기(2)
20XX년 7월 3일, 날씨 맑음!
안뇽! 오늘은 햇님이 가족들과 함께 쿠키를 구워먹은 날이야!
요리도구가 엄청 다양하고 재미있게 생겨서 너무 설렜어.
요 전이 햇님의 7번째 생일이라 케이크를 구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요리를 하게 되어서 너무 기뻤어!
... 그래서 쿠키 반죽을 오븐 속에 집어넣고 누나 형들이랑 카드 게임을 했는데... 어, 아빠다!
지금 막 아빠가 커다란 곰인형을 들고 햇님 방에 들어왔어! 와아! 그거 햇님 선물이에요? 너무 예뻐요!
아빠가 너무너무 반갑고 기뻐서 품에 파앙 하고 뛰어들으려 했는데, 아빠가 햇님을 밀쳤어.
햇님은 그대로 무릎부터 부딪쳐서 차가운 방바닥에 넘어졌어.
아빠? 아빠 왜그래요? 아빠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곰인형을 햇님 얼굴에 던졌어.
햇님은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엉엉 울었어.
그랬더니 아빠가 시끄럽다며, 조용히 하라며 햇님의 긴 머리카락을 팍 잡아당겼어.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지금 햇님을 때리고 있는 게 우리 아빠가 아닌 것 같았어. 마치 빨간 모자에 나오는 사악한 늑대 같았어.
지금 당장 어디론가로 도망가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빨간 모자는 사악한 늑대를 어떻게 무찔렀지?
사냥꾼 아저씨, 지금 햇님 목소리가 들린다면 도와주세요!
아파,아파,아파,아파, 아파서 자꾸 눈물이 나.
사라지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동화책 속의 상냥한 세계로 사라지고 싶어.
피터팬! 웬디! 언제 오는거야?
나쁜 아빠가 괴롭히고 있어, 어서 네버랜드로 데려가줘!
하얀 토끼씨!
햇님도 토끼씨 따라 이상한 나라로 갈래, 이 무서운 세계에서 나를 구해줘,
사악한 늑대에게 멱살이 붙들린 채 창문을 훔쳐보았더니, 이미 햇님이 저만큼 지고 온 하늘이 컴컴했어.
저 새까만 밤하늘이 창문을 깨고 온 집안을 집어삼킬 것 같았어.
햇님은 이미 졌어, 밤이 오자 도망가버렸어.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사라지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살려줘,살려줘,살려줘...
해피 버스데이, 달님.
달님의 이야기(2)
저는 아버지가 사라진 후, 밤의 시간을 이용해서 '낮의 츠키히'에 대해 짬짬히 조사를 해왔습니다.
처음엔 그 아이의 일기장이었지요.
일기장에 꼼꼼히 기록된 내용들을 보고 낮의 츠키히가 자신을 '햇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포함해서 많은 정보들을 알게 되었어요.
그 다음은 햇님의 캔버스와 스케치북이었습니다. 스케치북 속의 세계는, 눈부셨습니다.
저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갖 달콤함, 따스함, 낭만이 그 안에 가득했어요.
처음에는 나를 밤에 가둔 채 낮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는 햇님이 질투가 났고, 증오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함투성이의 어두운 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심지어 제 존재를 햇님에게 알리지 않고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햇님과 달님의 공존을 위해서...